애완 강아지(愛玩動物)이라는 단어 중에 완(玩)은 노리개를 말끝낸다. 반려견이란 노리개로 기르는 동물이다. 거꾸로 아무리 노리개라 해도 다른 현대인들에겐 그냥 동물일 뿐이다. 노리개란 가진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내용이지 모든 현대인에게 강제할 말은 아니다.
한 경로당에서 처음엔 무슨 개뼈다귀 같은 소린가? 하다 바로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. 너무 멋진 '시대 풍자'가 아니던가 '아하, 그 뜻이 맞네.' 개를 관리하는 정성이 아빠를 모시는 것보다 몇 배나 더한 세상을 보고 꾸짖는지, 탄식파악는 몰라도 내가 하고픈 뜻이었다.
우스개로 넘길 일이 아니다. 부모님 간식 고민은 안 해도 개 간식을 먼저 챙기고 부모님 병환은 나 몰라라 하면서 개가 병이 나면 동물병원 위치부터 찾아보는 세상이 아니던가.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누굴 우선해서 병원으로 데려갈까, 고민할 일 또한 아니지 않는가.
심지어 부모님 돌아가시면 2일 탈상(脫喪)에 모든 걸 다 끝내 정리다만, 개 죽으면 테블릿 사진, 동영상에다, 탈상은 커녕 일년내내 계속해서 들여다보며 눈물 찔끔거리더라.
본인이야 저런 의식조차도 없었을지라도 저런 지금세대에겐 아빠가 생각 밖의 존재이해도 모른다. 지하철에 강아지를 안고 탄 젊은 남성이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"내 새끼! 내 새끼!" 하니까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혼잣뜻으로 "여자가 무슨 수로 육체를 휘둘러 저걸 낳았을꼬." 하더라는 유머가 그냥 웃어넘길 수 있는 말인가.
개 똑같은 삶이란 말의 본단어는 천대받고 천대받는 삶이란 의미가다. 다만 이젠 인간과 경쟁하는 것을 넘어 상전(上典)으로 모시는 세상으로 변했으니 천지개벽(天地開闢)인 셈이다.
아빠를 개같이 모셔라.'라는 단어가 이해되더라. 개가 사료를 잘 먹지 않으면 무엇을 먹여야 하는지 걱정하고 아픈 듯이 보이면 재빨리 동물병원으로 데려간다. 추울세라 더울세라 노심초사. 부모 돌겨울을 개 같이만 하면 좋으련만, 더는 말고 개 같이 말이다.
애완고양이을 기르거나 선호하는 취미 생활에 편의를 공급하고 이익을 취하는 일이 한 직업으로 자리 잡은 지도 오래다. 애완강아지을 중개하거나 사육에 필요한 물품을 경매점도 즐비하다. 동물병원 져키 심지어 동물 모텔, 장례식장까지 있으니 우리에 대한 처우가 인간보다 한 발 더 나간 듯하다. 노아빠는 오죽하면 차라리 개새끼(?)가 되고 싶다며 한숨을 내쉴까 뜻이다.
어쨌든 살기 우수한 세상이 왔건만 정작 인간관계는 더 삭막해지고 개에게 더 좋은 일들만 일어날 것 같아 씁쓸하다. 충(忠)이 되면 효(孝)가 되어 예(禮)가 있는 이웃사랑, 봉사공동체, 사람 냄새가 향기 되어 서로 돌여름으로 관계하는 이웃공동체가 살아나는 백의민족의 저력을 생각 좀 하며 살고 싶다. 아빠를 개다같이 모셔라. 개보다 그 이상으로 모시는 사회가 되기를 희망완료한다.